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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2015-05-20 11:40
조회
890
기사 분야 : 문화/생활
등록 일자 : 2004/03/12(금) 21:14
[문학예술]‘유산’…버지니아 울프의 ‘상상세계’
◇유산/버지니아 울프 지음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 옮김/307쪽 9800원 솔
근대 영국 문학계는 남성 이름을 ‘필명의 마스크’로 쓴 채 작품을 써나간 여성들이 있었을 만큼 여성들에게 배타적이었다.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이 같은 영국 문학계에서 여성의 자의식을 들고 나온 페미니즘의 선구자였다.
이는 귀족 가문 출신인 데다 이른바 ‘블룸즈버리 그룹’에서 경제학자 존 케인스, 소설가 에드워드 포스터 등과 함께 교감을 나눈 당대 최고의 지성이란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울프는 1941년 주머니에 돌을 넣고 우즈 강에 투신자살했다.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타고난 데다 어려서 부모와 오빠를 잃고는 자기 내면 풍경을 우물처럼 들여다보곤 했다. 이런 습성은 굵은 사회사(史)를 주로 다뤘던 남성 작가들과 그를 차별화하는 계기가 됐다.
버지니아 울프. 스물아홉 살 때는 동료들과 함께 변장을 한 뒤 ‘에티오피아 황제 일행’이라고 속이고 영국 전함 드래드 노트호에 승선했을 정도로 장난기가 있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1편의 작품이 실린 단편집 ‘유산’은 초기작부터 숨지기 한 달 전에 쓴 작품까지 그의 문학 기량이 발현돼 가는 변천사를 드러내는 책이다. 이야기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작품부터 캐릭터들의 행동은 물론 의식까지 잡아낸, 당시로선 전위적인 실험작까지 다양하게 들어 있다. 지난 세기 초 ‘버지니아 울프라는 섬세한 여성의 자의식이 모아놓은 상상의 소품실’이라고 할 만하다.
가장 재미있는 작품인 ‘럭튼 유모의 커튼’은 조카들을 위해 쓴 동화다. 럭튼 유모가 커튼을 바느질하다가 잠들자 커튼 무늬에 담긴 동물들과 사람들이 슬금슬금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럭튼 괴물’이 깨어나 그들을 다시 커튼으로 돌려보내는 마술을 거는 것이다.
근대 여성의 자의식이 깨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편들 가운데 ‘소개’, ‘만남과 헤어짐’, ‘하나의 요약’ 등 세 편에는 댈러웨이 부인이 단역으로 ‘출연’해 흥미롭다. ‘댈러웨이 부인’은 울프의 장편 제목이기도 한데, 파티 준비를 일과로 삼는 하원의원 부인이다. 이 단편집에 나오는 댈러웨이 부인 역시 그렇다.
‘소개’는 난생 처음 파티장에 나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릴리 에버릿의 의식을 탐색하는 작품이다. 그녀는 한 사제에 대해 쓴 자기 글이 칭찬을 받자 파티장에서 자기 자아와 같은 그 글에만 온통 정신이 팔린다. 그런 그녀에게 댈러웨이 부인은 밥 브린슬리라는 오만한 남자를 소개해 준다. 브린슬리는 처음 만난 에버릿에게 “근대 문명은 남성이 만들어낸 것이며 여성은 성공한 남성의 장식품”이란 말을 서슴없이 한다. 울프는 이 같은 그의 오만한 내면을 찬찬히 묘사하면서, 그가 파리 날개를 뜯어 죽이는 행동을 묘사해 캐릭터를 강조한다.
이 같은 과정에 쓰인 것은 등장인물의 의식을 깊숙이 포착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다. 당시에는 낯선 실험성으로 빛을 발했지만 이제는 고색창연한 골동품으로 취급 받는 기법이다.
그러나 1920년대에 선구적인 작가들이 밀어붙였던 이 같은 실험이 없었더라면 40년대 미국 대중소설 작가 제임스 서버가 어떻게 ‘월터 미티의 숨겨진 삶’ 같은 작품을 썼겠는가. 옹색한 공처가가 자기 머릿속으로는 천하의 열혈남아를 꿈꾸고 있는 그 기막힌 작품을.
권기태기자 kkt@donga.com
등록 일자 : 2004/03/12(금) 21:14
[문학예술]‘유산’…버지니아 울프의 ‘상상세계’
◇유산/버지니아 울프 지음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 옮김/307쪽 9800원 솔
근대 영국 문학계는 남성 이름을 ‘필명의 마스크’로 쓴 채 작품을 써나간 여성들이 있었을 만큼 여성들에게 배타적이었다. 버지니아 울프(1882∼1941)는 이 같은 영국 문학계에서 여성의 자의식을 들고 나온 페미니즘의 선구자였다.
이는 귀족 가문 출신인 데다 이른바 ‘블룸즈버리 그룹’에서 경제학자 존 케인스, 소설가 에드워드 포스터 등과 함께 교감을 나눈 당대 최고의 지성이란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울프는 1941년 주머니에 돌을 넣고 우즈 강에 투신자살했다.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타고난 데다 어려서 부모와 오빠를 잃고는 자기 내면 풍경을 우물처럼 들여다보곤 했다. 이런 습성은 굵은 사회사(史)를 주로 다뤘던 남성 작가들과 그를 차별화하는 계기가 됐다.
버지니아 울프. 스물아홉 살 때는 동료들과 함께 변장을 한 뒤 ‘에티오피아 황제 일행’이라고 속이고 영국 전함 드래드 노트호에 승선했을 정도로 장난기가 있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21편의 작품이 실린 단편집 ‘유산’은 초기작부터 숨지기 한 달 전에 쓴 작품까지 그의 문학 기량이 발현돼 가는 변천사를 드러내는 책이다. 이야기 실력을 유감없이 드러낸 작품부터 캐릭터들의 행동은 물론 의식까지 잡아낸, 당시로선 전위적인 실험작까지 다양하게 들어 있다. 지난 세기 초 ‘버지니아 울프라는 섬세한 여성의 자의식이 모아놓은 상상의 소품실’이라고 할 만하다.
가장 재미있는 작품인 ‘럭튼 유모의 커튼’은 조카들을 위해 쓴 동화다. 럭튼 유모가 커튼을 바느질하다가 잠들자 커튼 무늬에 담긴 동물들과 사람들이 슬금슬금 살아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일은 ‘럭튼 괴물’이 깨어나 그들을 다시 커튼으로 돌려보내는 마술을 거는 것이다.
근대 여성의 자의식이 깨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편들 가운데 ‘소개’, ‘만남과 헤어짐’, ‘하나의 요약’ 등 세 편에는 댈러웨이 부인이 단역으로 ‘출연’해 흥미롭다. ‘댈러웨이 부인’은 울프의 장편 제목이기도 한데, 파티 준비를 일과로 삼는 하원의원 부인이다. 이 단편집에 나오는 댈러웨이 부인 역시 그렇다.
‘소개’는 난생 처음 파티장에 나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릴리 에버릿의 의식을 탐색하는 작품이다. 그녀는 한 사제에 대해 쓴 자기 글이 칭찬을 받자 파티장에서 자기 자아와 같은 그 글에만 온통 정신이 팔린다. 그런 그녀에게 댈러웨이 부인은 밥 브린슬리라는 오만한 남자를 소개해 준다. 브린슬리는 처음 만난 에버릿에게 “근대 문명은 남성이 만들어낸 것이며 여성은 성공한 남성의 장식품”이란 말을 서슴없이 한다. 울프는 이 같은 그의 오만한 내면을 찬찬히 묘사하면서, 그가 파리 날개를 뜯어 죽이는 행동을 묘사해 캐릭터를 강조한다.
이 같은 과정에 쓰인 것은 등장인물의 의식을 깊숙이 포착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다. 당시에는 낯선 실험성으로 빛을 발했지만 이제는 고색창연한 골동품으로 취급 받는 기법이다.
그러나 1920년대에 선구적인 작가들이 밀어붙였던 이 같은 실험이 없었더라면 40년대 미국 대중소설 작가 제임스 서버가 어떻게 ‘월터 미티의 숨겨진 삶’ 같은 작품을 썼겠는가. 옹색한 공처가가 자기 머릿속으로는 천하의 열혈남아를 꿈꾸고 있는 그 기막힌 작품을.
권기태기자 kkt@donga.com